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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자료] 성경해석학 - 반복의 법칙 & 강조의 법칙

  • 작성자 사진: 갈보리침례교회 바이블빌리버
    갈보리침례교회 바이블빌리버
  • 2024년 6월 5일
  • 2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6월 26일

24.06.05.

[성경공부 자료] 성경해석학 - 반복의 법칙 & 강조의 법칙





성경해석학 Biblical Hermeneutics

반복의 법칙 & 강조의 법칙 -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만큼 강조하라”

극단적 칼빈주의 V.S. 온건한 칼빈주의


오늘은 성경 해석학 중 반복의 법칙과 강조의 법칙을 통합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둘 다 각자 정의가 있지만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만큼 강조하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조를 위해서 반복의 법칙을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 강조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들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극단적 칼빈주의와 온건한 칼빈주의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복의 법칙>

The Law of Repetition

주님께서는 강조하기 위해 내용을 반복하신다.

The Lord repeats material for emphasis.


반복의 법칙은 ‘주님께서는 강조하기 위해 내용을 반복하신다.’하나님께서는 강조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용을 반복하십니다.


<반복의 법칙>

The Law of Repetition

훌륭한 교사의 교수법–반복법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반복하시는지 주목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죠? 훌륭한 교수법 중에 하나가 반복법 입니다. 여러분이 복습을 하거나 어떤 진리를 익히거나 하나님의 말씀 내용이나 그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반복 없이는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없죠.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반복하시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중요한 것은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표준킹제임스성경] 베드로후서 1:12

이러한 이유로 비록 너희가 그것들을 알고 있고 현재의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졌어도 항상 너희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나는 태만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장 12절에 보면요. ‘이러한 이유로 비록 너희가 그것들을 알고 있고 현재의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졌어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해요. “너희가 그것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항상 너희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나는 태만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 특히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이제 생을 마감하기 전에 양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항상 기억나게 하는 이유를 설명을 하죠. 이런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현재 잘하고 있어도 반복해야 되는데 오죽하겠냐? 라는 거죠.


<반복의 법칙>

The Law of Repetition

[표준킹제임스성경] 이사야서 28:10

이는 반드시 규범 위에 규범이 있어야하고, 규법위에 규범이 있어야하며, 어구 위에 어구가 있어야하고, 어구 위에 어구가 있어야하며,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있어야하기 때문이라.


이사야서 28장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알려주시는 방법이 나와있는데요. ‘규범 위에 규범이 있어야하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규범위에 규범이 있어야하며, 어구 위에 어구가 있어야하고,’ 어떤 특정 어구가 있죠? 그 어구가 계속 반복돼서 나온다는 거죠. ‘어구 위에 어구가 있어야하며,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있어야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 비슷한 내용이 여기서도 있고 저기서도 있고 여기 저기에 있어요. 그렇게 해서 성경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내용을 반복하면서 더욱 더 진리를 확장해 가는 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고 이렇게 중요시 여겨야겠죠?

 

<반복의 법칙>

The Law of Repetition

[표준킹제임스성경] 고린도후서 13:1

이번이 내가 너희에게 세 번째로 나아가는 것이라. 모든 말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립 되어야 하리라.


고린도후서 13장 1절에는 ‘모든 말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립 되어야 하리라.’라고 돼 있어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율법에서 보면, 율법은 재판을 하기 위한 이스라엘에게 준 헌법이기도 한데, 율법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고, 무엇인가를 확증할려면 반드시 혼자가 아니라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적 교리도 전에 설명드렸지만 그냥 한 구절만 가지고 세워지는게 아니라 적어도 두 세개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 다른 구절과 충돌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있어야만 교리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표준킹제임스성경] 고린도후서 13:1

이번이 내가 너희에게 세 번째로 나아가는 것이라. 모든 말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립 되어야 하리라.

[표준킹제임스성경]마태복음18:16

... 만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모든 말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립되게 하려 함이라.


자, 생각해 보세요. 이곳을 지키는 세 명의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해 보십시요. 특히 경계 근무를 서게 되면 서로 다른 방향에서 경계를 해야 되죠? 한 사람이 앞 뒤를 다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명이 사라졌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겠죠? 종종 개역성경에 있는 어떤 구절 중에 한 부분이 사라진 것을 보고 “이 부분이 삭제가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왜 없음이 있냐? 없음이 있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 “아, 괜찮아요. 이런 비슷한 구절이 마태복음에는 없어도 마가복음에는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 그게 괜찮은게 아니죠. 하나님의 의도는 마태복음에도 있고 마가복음에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딱 빼버리면 교리가 약화가 되고 나중에 그 성경만을 기준으로 해서 신학을 정립하면 아예 그게 교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파수꾼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라!


그래서 아주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이런 파수꾼들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가 경계를 해야 되겠죠.       


<반복의 법칙>The Law of Repetition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장

     ✖ 2


오병이어의 기적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

요한복음 6장

   ✖ 4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사복음서에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에서 두 번, 제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에요. 사복음서 모두에서 언급이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물론 계보도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이나 반복을 하셨어요. 사복음서에 딱 한 번만 등장하는 것들도 있는데 두 번이나 등장을 했으니까 중요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에요. 특히 요한복음 6장에서 그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영원한 빵, 생명의 빵으로 제시하시죠.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요.  그래서 그만큼 더 강조를 하셨다는 겁니다.


<반복의 법칙>The Law of Repetition

[표준킹제임스성경] 요한계시록 12:6

그리고 그 여자가 광야 속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예비된 처소가 그녀에게 있었으니, 그들로 하여금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녀를 먹이게 하려 하심이라.

오병이어의 기적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

요한복음 6장

   ✖ 4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에 있는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었어요. 복음을 전할 때뿐만 아니라 나중에 이스라엘이 초자연적으로 부양을 받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 음식을 받는 것과 연관이 있어요. 마치 출애굽 때 한번 광야에서 초자연적으로 만나를 먹었듯이 다시 재림 때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먹이시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복음서에 보면 초림보다 재림과 관련된 구절을 하나님께서 훨씬 더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반복의 법칙>The Law of Repetition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초림에 관한 예언 수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재림에 관한 예언 수 월등히 많음

성경은 십자가보다 예수님의 재림을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룬다.


예언의 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림에 관한 예언 수보다 재림에 관한 예언 수가 월등히 많아요. 하나님의 초점이 재림에 훨씬 더 많이 있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있죠. 하나님 보시기에는 초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재림이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초림이 더 중요할 수 있어요. 왜냐면 예수님이 초림 때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으로서는 어떻겠어요? 초림 때는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살해 당하셨어요. 그런데 재림 때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라면 자녀가 고난을 당하는 날을 더 중요시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영광을 받는 날을 더 중요시 여기겠습니까? 당연히 영광을 받는 날이겠죠. 결국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보면 일관적으로 흐르는 흐름이 왕과 왕국이라는 흐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펼치는 왕국에서 영원히 통치하시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재림에 비중이 더 갈 수밖에 없는 거죠.


<반복의 법칙>The Law of Repetition

교회와 그리스도인: 교회 시대의 교리 왕과 왕국: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 아닌 ‘왕과 왕국’이다!


교회 시대의 교리는  바울 서신에 집중 돼 있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해요. 하지만 성경 66권 전체를 봤을 때는 교회 시대의 교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게 더 많이 있어요. 구약이 거의 사분의 삼이고 신약이 사분의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신약 중에서도 또 바울 서신이 한 반 정도 밖에 안돼요. 구약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더 많죠. 그 중에 대다수가 예언서들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안 읽어서 그렇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 그리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소예언서들을 쭉 봐도 압도적인 양이에요. 그리고 대부분의 시편 또한 예언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언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추어 주셨던 신비인 교회보다 더 많이 압도적으로 다루시는게 왕국이에요. 여러분이 정말 성경을 잘 알고 싶으면 예언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게 진짜 성경의 주제니까요. 우리를 위해서는 교회 시대 교리가 중요한데 여기에서 더 넘어서야 돼요. 나에게만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결코 교리를 다룰 때 성경 기록보다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해서는 안된다.

One should never overemphasize or underemphasize a doctrine unless the Scriptures do.

 

하나님께서 강조하기 위해서 내용을 반복하시는데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조의 법칙으로 넘어가면 ‘결코 교리를 다룰 때 성경 기록’ 자체가 강조하는 것보다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만큼 강조해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했을 때 교리가 왜곡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만큼만 강조해야 돼요. 아무리 좋은 단어도 그 이상 강조를 해버리면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가 있습니다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표준킹제임스성경] 신명기 5:32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준수하여 행할지니라. 너희는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벗어나지 말지니라.


극단적 세대주의, 극단적 칼빈주의 등 성경과 다른 강조점을 가지는 오류에 주의하라.


신명기 5장 32절에 보면요.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준수하여 행할지니라. 너희는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벗어나지 말지니라.’ 자, 한쪽으로 벗어나 버리면 정도를 벗어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벗어나는게 아니라 정도로 가기를 원하시는데 오른편으로나 왼편으로 벗어나면 극단적으로 돼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치우쳐 버리는 거죠. 그래서 주변에 보면은 극단적인 은사주의, 극단적인 세대주의, 극단적 칼빈주의 등 많은 극단적인 교리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표준킹제임스성경] 디모데후서 3:12

그런즉 진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박해를 받으리라.


 예를들면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쓰신 방법이 ‘진정’이에요. 하나님께서 좀 중요하다 싶으시면 이런 것들을 넣으세요. ‘진실로 진실로’ 이렇게요. 예수님께서 한번 ‘진실로’ 얘기할 때도 중요해요. ‘진실로 진실로’ 두번 하시면 아주 중요한 거예요. ‘진정’이 들어가면 “아, 중요해서 강조하신다.”라고 보면 되는 거죠. ‘진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박해를 받으리라.’ 경건하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예외 없이 박해를 받는다는 거에요.


[개역/개정]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무릇 - 대체로, 일반적으로

진정’을 ‘무릇’으로 대체하고 ‘모든’을 삭제함 => 강조점을 삭제함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무릇’ 이라고 했죠. 무릇은 무슨 뜻이냐면? ‘일반적으로’라는 뜻이에요. ‘모두’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리고 ‘모든’ 이라는 단어가 삭제됐어요. 이런 식으로 강조가 축소 되면 안돼요.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박해를 받는게 아니라 안 받을 수도 있다가 돼 버리는 겁니다.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예수님의 강조1단계

[표준킹제임스성경]  마태복음 5: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어떤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정욕을 품는 자는 이미 자기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한 것이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시고는 쭉 애기를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이걸 말한다.” 하시고는 “잘들어.” 이러면 예수님의 강조 1단계죠.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예수님의 강조2단계

[표준킹제임스성경] 마태복음 5:18

이는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모두 성취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


그런데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더 강조를 하신거죠.


<강조의 법칙>

The Law of Emphasis

-예수님의 강조3단계

[표준킹제임스성경] 요한복음 3: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셨더라.


여기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정말 강조를 하셨구나!”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강조법을 쓰십니다.


<강조의 법칙>The Law of Emphasis

42 truly 참으로

340 yea 진정

140 verily 진실로

4 in very deed 정녕코

70 indeed 정녕

7 doubtless 의심의 여지 없이

284 surely (긍정문) 반드시, 확실히, 분명히, 과연, 흔들림 없이(부정적) 결단코


성경에서는 이 부사가 참 중요해요. 그래서 표준킹제임스성경은 이 부사 하나도 삭제하지 않고 다 살렸거든요. 보시면 갯수가 엄청납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마다 표현도 다 다르게 했죠. truly, yea, verily, in very deed,  indeed, doubtless, surely, 참으로, 진정, 진실로, 정녕코, 정녕, 의심의 여지 없이, 반드시..등등. 이런 표현들을 다양하게 다 살렸어요. 그런데 개역성경이나 또는 어떤 다른 한국 성경들 보면 이 부사들을 다 안 살릴 때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강조한 부분에서 강조를 빼버린 거죠. 그런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림) 외콜람-파디우스, 잔키우스, 마르틴 부처 존 녹스, 버미글리, 쯔빙글리, 폭스, 퍼킨스, 하인리히 불링거, 위클리프, 베자, 칼빈, 루터, 멜란히톤, 얀 후스

 

복음의 불빛

종교개혁자들과 복음의 불길을 끄려는 대적들.

- 그러나 불빛이 너무 높아 끌 수 없다.

 

조금 더 초점을 맞춰서 극단적 칼빈주의와 온건한 칼빈주의를 비교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와 온건한 칼빈주의의 차이점은요? 칼빈주의에 온건한 부분들이 있어요. 괜찮은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강조했을 때 차이가 생깁니다. 이러한 오류들을 이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과 관련된 유명한 그림이에요. 모두가 동일한 시대 사람들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위클리프 같은 경우에는 종교 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는데 초기에 영어성경을 번역한 사람이고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시기에 걸쳐져 있어요. 어쨌든 종교개혁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한 장에 그려 놨죠. 그러면서 로마 카톨릭 교황을 포함해 대적하는 사람들도 함께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불빛”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여기서 보면 훌륭한 일들을 한 종교 개혁자들이 많이 있죠? 일단은 개혁을 했다라는 자체로 우리가 점수를 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목숨을 걸고 했어요. 그리고 불의와 잘못된 것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교리적으로 완벽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각자 교리적 한계점은 있죠. 그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루터보다 칼빈이 유명 하잖아요? 원래 전 세계적으로 칼빈주의가 그렇게 유명한 교리가 아닌데 우리나라에 특히 장로교가 많음으로 인해서 칼빈주의가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다른 교단들도 생겨났죠. 이번에 문제가 되었던 박옥수 구원파도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수동적 믿음이라든지, 깨닫는 믿음, 믿어지는 믿음, 뭐 이런 것으로 문제가 되었는데요. 이게 극단적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Sola Fide(오직 믿음)

•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 어떤 공로도 요구되지 않는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예를 들면요, 이 종교 개혁자들이 말하는 다섯 부분의 Sola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저도 동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온건하다고 할 수 있어요.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다.’ 저도 당연히 동의하고 아주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아주 좋은 거죠. Sola Gratia(오직 은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저도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Sola Fide(오직 믿음),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 어떤 공로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렇죠. 우리가 행위 구원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죠.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구원은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다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칼빈주의도 여기에 동의를 하죠.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도 동의할 접점이 있고 이런 것은 온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극단적인 칼빈주의가 어느 부분을 더 강조함으로 인해서 문제를 만들었는지 그 부분을 비교해서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의 기원 - 도르트총회 91618-1619)

알미니안주의자들 - 네덜란드 노회

네덜란드 개신교도 알미니안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개혁주의 교리에 대하여 5가지 이의를 제기하였다. 도르트 신조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기한 각 문제에 대해 네덜란드 노회측의 답변을 적은 것으로 그것을 요약한 것이 칼빈주의 5대강령이다.


특히 칼빈주의 5대강령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도르트 총회에서 나온 겁니다. 물론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쓸 때는 이 “칼빈주의 5대강령”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거기(기독교 강요)에는 이런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어요. 그것을 도르트 총회에서, 도르트는 네덜란드에 있어요. 네덜란드 개신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칼빈주의의 문제를 제시를 했고 여기 네덜란드 노회에서 이들을 반박을 하면서 요약을 한게 칼빈주의 5대강령입니다. 그래서 이 칼빈주의 5대강령이 지금 칼빈주의를 믿는사람들이 따르는 주요 교리가 됐습니다. 사실상 장로교라고 해도 각 교회랑 각 노회랑 각 교단마다 다 다릅니다. 5대강령을 다 믿는 곳도 있고 일부만 믿는 곳도 있고 부분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누가 극단적인 칼빈주의냐? 이 5대강령을 다 믿고 또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되는 거죠.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자, 여기서 칼빈주의 5대강령이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인데 이들 영어의 앞글자를 따서 “튤립”이라고도 하죠. 이 부분들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힌트를 드리자면요. 저는 이 중에 “타락, 선택, 속죄, 은혜, 견인” 이 부분은 동의할 수 있어요. 그런데 빨간색으로 돼 있는 부분은 제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어느 정도 맞는 말을 하긴 했지만 더 넘어서서 극단적인 주장을 했어요. 저는 인간이 타락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전적 타락은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타락하고 인간의 의지까지 완전히 무능력해서 예수님을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건데 사실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무능력이에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 믿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그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선택은 믿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속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 속죄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다라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합니다. 성경에도 적혀 있고요. 저는 하나님께서 견인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도가 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자, 이 부분들을 하나씩 설명을 드릴게요.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르트 신조)


좀 헷갈릴 수 있으니까 쉽게 색깔로 구분해 놨습니다. 파란색이 좀 온건한 부분, 맞는 부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빨간 부분이 조금 더 치우쳐서 극단적으로 벗어난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저도 모든 자연인, 구원받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본성이 타락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믿을 수 없다? 저는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제1권 15장8절).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제2권 2장12절, 제2권3장5절).


왜 그러냐? 일단 구체적으로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직접 뭐라고 썼는지 보세요.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다.’ 자유의지는 속박이 돼서 발휘할 수 없다는 거예요. 무엇을 향해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까 칼빈이 믿는 그 자유의지는 절대 선을 행할 수 없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거에요. 그다음에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자유의지를 뺏겼다 하죠?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칼빈이 한 말이죠. 그 당시에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오히려 본인을 변론을 합니다. 자,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 자유를 빼앗겼다고 표현을 하는 거죠.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가 대립을 했을 때, 아, 저는 알미니안주의도 아니고 칼빈주의도 아닌 그냥 바이블빌리버에요. 그들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믿으면 됐어요. 둘 다 치우친 부분들이 있는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유 의지면에서는 잘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그 당시에 자유의지를 거부 했습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표준킹제임스성경] 로마서 3:10-12

기록된 바와 같으니라. “의로운 자는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이해하는 자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났으며, 그들이 함께 무익해졌도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극단적 칼빈주의식 해석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자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


로마서 3장 10-12절 보세요. ‘기록된 바와 같으니’ 성경을 있는 그대로 봅시다. ‘“의로운 자는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다 동의 할 거예요. 자, ‘이해하는 자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났으며, 그들이 함께 무익해졌도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그 뒤에 13절부터 쭉 내려가면 점점 이렇게 말하죠. 그 사람들의 눈도 악하고 입도 악하고 손도 악하고 발도 악하다. 쭉 타락을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단 한번도 무능력을 얘기하지 않아요. 보세요. ‘이해하는 자가 없다’는 거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찾는다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스스로 ‘다 길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선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어떻게 이해하냐면요?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자가 없다’로 추가, 첨가해서 이해합니다. 보세요. 자기네 교단 교리를 먼저 세워놓고, 선입견이 있는 상태에서 딱 보면 어떻게 보이냐면요?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가 없다. 다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선을 행할수 있는 의지가 있는 자가 없다. 라고 첨가해서 얘기하게 됩니다. 성경 이 부분에서는 단 한번도 무능력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말하는 겁니다. 자, 이런 부분을, 똑같은 구절인데도 칼빈주의는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를 얘기하는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표준킹제임스성경] 사도행전 16:31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너의 집도 그러하리라.” 하였더라.


만약에 무능력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한테,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겠죠. 그러면 불의 하시죠. 할 수 없는 사람한테 “~~하라.” 예를 들면 장애인한테, 무능력이란건 능력이 없는 거죠? 그래서 장애인을 영어로 disability, 장애를 가진 사람, 무능력, 그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뭐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데 그냥 옆에 가서 “자, 일어서서 걸어.” 그렇게 말한다고 걸을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또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해.” 그러면 내가 불의한 사람이죠. 장애인한테 “왜 말도 못하냐?”고 책망을 하는 제가 못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죠? 무능력한 사람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한테 명령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있는게 아니라요.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표준킹제임스성경]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너의 입으로 주예수를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너의 마음속에 믿는다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


로마서 10장 9-10절 보면요. ‘네가 만일 너의 입으로 주예수를 시인하고’ 누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자유 의지가 없으니까 믿게 해 주시는게 아니죠? 너가 시인하라는 거예요. 너가 너의 입으로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의 마음속에 믿는다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 사람에게 “네가 하라.”고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1강령: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표준킹제임스성경] 시편 119:108

오, 주여, 제가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의 입에서 자유의지로 드리는 제물들[freewill offerings]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당신의 공의로운 법규들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 성경에 “자유의지”[freewill]란 단어가 17회 등장하며 모두 선을 행하는 것과 관련 있다.


시편 119편 108절 보면요. ‘오, 주여, 제가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의 입에서 자유의지로 드리는 제물들[freewill offerings]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당신의 공의로운 법규들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자유의지란 표현이 나옵니다. 자, 분명히 자유의지, freewill이라는 단어가 있죠. 그러니까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에 있는 것을 거부해 버린 거예요. 우리가 조화의 법칙을 배웠죠? 그러면 조화의 법칙과도 어긋납니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 원래 칼빈 자체는 아마 의도는 선했던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들은 뭘 강조하고 싶었냐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서, 이걸  sovereignty라고 하는데 이 주권이란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 뜻대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는데 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이런 의문이 생긴 거예요. 이것은 성경적 사실이죠? 그러면 이 사실에 자기의 생각을 맞춰야 되는데, 주권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놓고 그걸 너무 높이다 보니 “그러면은 하나님이 그걸 못하신게 아니야.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래서 이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어.”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 선택해 줘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스스로 믿을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 되고,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안 믿게 해주셨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거고, 이것도 다 하나님 뜻이야.” 이렇게 말하니까 성경과 어긋나게 된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자유 의지로 제물들을 드린다고 했어요. 분명히 선한 행위를 자유의지로 했어요. 하나님께 제물들을 드리는 것을 자유의지로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에 자유의지라는 단어가 17번 등장하거든요. 물론 개역성경에는 자유의지란 단어가 다 삭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개역성경에는 이 단어가 없죠. 그런데 정확하게 킹제임스성경에는 살려져 있고 17번 등장하는데 모두 선을 행하는 것과 관련 있어요. 심지어 다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신약성경의 거듭남이 아직 등장하기 전인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선을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이 구약에서 모두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제1강령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은 성립되지 않죠.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허용해 주시고 스스로 선택하게 해주신 거예요. 스스로 그것을 순종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제3권 23장7절).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제3권 23장7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고 말한다”(제3권21장7절).


두번째 강령을 보시면요. 선택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죠? 그런데 무조건적인 선택? 이 부분이 극단적으로 치우쳤다는 거예요. 칼빈은‘“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고 말하죠. 그래서 지금 칼빈주의자들이 이해를 못하는게 “하나님이 죄로 타락하는 것을 예정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아담 혼자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지?” 그걸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책임이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책망하시는 거죠. 분명히 안 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한 거니까요. 그런데 성경에 없는 말을 칼빈주의자들은 하면서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 지옥 보내시는 분인 거예요. 하나님이 일부러 타락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칼빈은 두 가지를 오해했습니다. 먼저 어린아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가지 않습니다. 갓난아기들은 아직 선악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지 않으세요.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없었죠. 왜냐면 로마카톨릭에 워낙 오래 있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에 있다가 개혁을 했기 때문에 카톨릭의 영향을 받았어요. 로마 카톨릭은 어린아이들도 원죄가 있기 때문에 림보에 간다고 하죠? 그 부분에 있어서 영향을 받고 잘못된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가는 거다. 누구 때문이냐? 봐라 아이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선택한게 아니지 않냐? 하나님이 한거다.” 이런 논리로 간 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전에 확정하셨다.’ 자, 창세 전에,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정하셨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지옥에 가기로 정하신 사람은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은 무슨 죄를 지어도 결국 구원받을 거니까요. 이게 공평한 하나님이 맞습니까?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1강령부터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이게 어그러지면서 극단적으로 나간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표준킹제임스성경] 에베소서 1:5-7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속한 선한 기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들로 입양하실 것을 예정하셨으니,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은혜 안에서와 그 사랑받으시는 이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게 하셨느니라.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분의 은혜의 부요함에 따른 것이라.


일단 칼빈주의자들이 에베소서 1장을 자주 인용하죠. 그러면서 “여기에 예정이 있지않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간과해요? 성경은 있는 그대로 모든 단어를 다봐야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속한’의 뜻이 나오죠? ‘선한 기쁨을 따라’ 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을 것을 예정하셨나요? 아니요. 우리를 ‘자신의 자녀들로 입양하실 것을 예정하셨으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에 속한 선한 기쁨에 따라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을 예정하셨으니.” 라고 이해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 다음에 또 ‘입양’이라는 단어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아니죠? 일단은 진행을 해볼게요.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예정의 목적이 뭐에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에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은혜 안에서와 그 사랑받으시는 이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그냥 받아들이신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 받으시는 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 안에서 받아들여지게 하셨습니다. 또 ‘그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죠?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으니,’ 무엇을 통해서요? 그분의 피를 통하여. ‘이는 그분의 은혜의 부요함에 따른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부요한 은혜라는 거예요. 자, 보세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조건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분의 피를 통하여’ 조건입니다. ‘그분 안에서’ 조건이예요. ‘그 은혜 안에서와 그 사랑받으시는 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조건입니다. 언제 이 조건이 되느냐?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이 예정이 효력을 발생합니다. 창세 이전에 예정하신게 아니라는 거예요. 창세 이 전에 예정하신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자신의 자녀들로 입양하실 것을 예정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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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표준킹제임스성경]에베소서 2:12

이런 이유로 너희가 과거에 육체로는 이방인들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너희는 사람들의 손으로 육체에 행해진 할례를 받아 할례자로 불리는 자에게 무할례자라 불리는 자들이라.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국가에 속하지 않은 외지인들이었고 약속의 언약들과 상관없는 타국인들이었으며, 어떤 소망도 없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느니라,


자, 보세요. 에베소서 2장 12절에 보면 언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지 설명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너희가’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이죠. ‘과거에 육체로는 이방인들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은 이방인들이 아니라는 거죠.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이방인, 육체로 보면, 이렇게 둘로 구별하시고 영적으로는 구원받으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손으로 육체에 행해진 할례를 받아 할례자로 불리는 자에게 무할례자라 불리는 자들이라. 그때 너희는’ 과거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구원받기 전에, 예수님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느니라,’ 그런데 언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예수님 믿었을 때 예수님 안에 들어가요. 성경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잖아요. 우리가 영적 침례에 대해서 배웠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의 영이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거잖아요. 그때 들어간 거예요. 그때 효력이 발생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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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표준킹제임스성경]로마서 8:29

이는 그분께서 또한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기 때문이니,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첫째로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녀로 입양을 하시기로 예정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일단 미리 아심이 전제에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미리 아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주권을 미리 아심 보다 더 먼저 놓거든요. 그러나 미리 아셨다고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는 거예요. 여기서도 입양을 하기 위해 예정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구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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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성경적 해석 그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입양될 것과 아들의 형상과 일치될 것이 예정

그리스도 안 <=자유의지로 믿어야 함Ⓐ     Ⓑ=>

                     <=자유의지로 믿어야 함©


무슨 말이냐? 자, 쉽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먼저 예정하시고 결정하신게 뭐냐면? 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미리 다 계획해 놓으셨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입양하고 그다음에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겠다.”라고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예정을 해놓으셨어요. 그런데 아직 그리스도 안에 아무도 안 들어갔죠. 왜냐면 예수님이 아직 안 죽으셨으니까요. “그런데 앞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건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내가 내 아들로 삼아 주고 그리고 아들의 형상에 일치되게 할게.” 라고 예정을 해놓으신 거예요. 그런데 언제 죽으셨어요? 2천년 전에 죽으신 거예요. 그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고 그때부터 교회사 2천년 동안 누구든지 예수님 믿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이걸 자유의지로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유의지로 믿어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이때 “그리스도 안으로 누구든지 들어오면 내가 아들로 입양을 해 줄게.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게 해줄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봐야 되는데 칼빈주의는 어떤 특정 단어, 예정이란 단어, 선택이란 단어만 너무 강조한 거죠.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극단적 칼빈주의식 해석 : “구원받도록 예정하셨다”!?

그리스도안 <=구원받도록 예정됨?Ⓐ ✖ 지옥에 가도록 예정됨?Ⓑ=> ✖

                   <= 들어가도록 예정됨?© ✖

                     

극단적 칼빈주의식 해석은 구원받도록 예정됐다고 말하거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도록 예정됐다하고 하는 건데 그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에요. 그리고 지옥에 가도록 예정됐다는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에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 2강령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표준킹제임스성경]마태복음 20:16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이 된 자들이 처음이 될 것이며, 처음 된 자들이 마지막이 되리라. 이는 부름을 받은 이들은 많으나 선택된 자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

[표준킹제임스성경] 잠언 1:24

이는 내가 계속 너희를 불러 왔으나 너희가 거부하였기 때문이라. 내가 나의 손을 뻗었는데도 유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마태복음 26장 16절에 보면요. 선택이라는 것은 이런 개념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이 된 자들이 처음이 될 것이며, 처음 된 자들이 마지막이 되리라. 이는 부름을 받은 이들은 많으나’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요. ‘선택된 자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 칼빈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개념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불러요. 여기서는 섬김으로 부르시는 거고 또 구원으로 부르신다고 하시거든요.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불러요. 예를 들면, 혼인 잔치에 오라고 열심히 불러요. “여기로 와.” 그런데 사람들이 거절해요. 그 중에 응답을 하고 초대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겁니다. 부르시고 그다음에 선택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해요. 자, 무조건 처음부터 다 오도록 선택하시는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잠언 1장 24절에 보면 그 부르심을 인간은 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계속 너희를 불러 왔으나 너희가 거부하였기 때문이라.’ 그게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부르심의 관계에요. 선택의 관계입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3강령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의 죄만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 유기된자들에게는 속죄가 주어지지 않았다.”(도르트신경 제2장3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해 제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로 인한 것뿐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것이기도 하니라.” (<표준역>요일 2:2)

“여기의 온세상은 버림받은 자들을 포함하지 않으며 이세상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요일 2:2에 대한 칼빈의 주석).


제3강령을 볼게요. 속죄, Atonement. 아주 중요한 개념이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속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속죄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구원을 못받죠?  온건한 칼빈주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극단적 칼빈주의를 안 믿는 사람들이죠?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좋은 구령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요?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 놨거든요. 그럼 내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알아서 다 하실 텐데요. 그런데 자기의 교단이나 또는 어떤 영향을 받아서 칼빈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는 상식적으로나 성경으로 봐도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 했고 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열심히 전한 거죠. 그 사람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럼 여기서 보세요. 제한된 속죄라는 게 무슨 말이냐면? ‘선택된 자의 죄만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 유기된자들에게는 속죄가 주어지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참 문제가 많은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피를 흘렸는데 극단적 칼빈주의에서는 유기된 자,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속죄가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는 피도 안 흘려 주셨다라는 거예요. 왜 그래요? 자꾸 주권을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피흘렸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구원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구원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요한일서 2장 2절을 인용하면서, 분명히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해 제물이시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해 제물입니다. ‘우리의 죄들로 인한 것뿐 아니라’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오히려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것이기도 하니라.”’ 분명히 얘기하셨잖아요?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의 화해 재물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제물이시기도 하다고 분명히 했잖아요. 예수님은 세싱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선택된 자들만, 뭐 믿는 자들을 위해서만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구절을 가지고 칼빈은 뭐라고 말하냐? 똑같은 구절을 보는데도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의 온세상은 버림받은 자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세상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은 성경에 없는 말을 첨가를 하는 거예요. 온 세상이면 온 세상입니다. 여기서 어떤 말을 첨가했어요? 선택된 온 세상 사람들, 이렇게 첨가를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했을 때 문제가 된다는 거죠.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3강령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표준킹제임스성경] 디모데전서 2:6

그분께서 모두를 위하여 하나의 속량 값으로 자신을 주셨으니, 합당한 때에 증언을 받으시리라.

칼빈주의식 해석

여기서 “모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자”로 한정함

 

디모데전서 2장 6절에도 당연히 모두죠. 그런데 칼빈주의식 해석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자” 자꾸 없는 말을 넣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첨가에요.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됩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3강령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표준킹제임스성경] 디모데전서 2:4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기를 원하시고, 또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 4절,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기를 원하시고, 또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원하세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죠. 사람들이 거절하니까요.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3강령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표준킹제임스성경] 디모데전서 4:10

이는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수고도 하고 치욕을 감내하기 때문이니,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시니, 특별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라.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서도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시니, 특별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라.’고 했잖아요. 보세요. 분명히 믿는 자들모든 사람들은 두 개의 다른 대상들입니다. 모든 자들의 구원자이시지만 이 중에서도 특별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다 믿는 사람들이 아니죠.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칼빈주의자에게는 이런 부분들이 문제가 되겠죠.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4강령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제2권 2장6절).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 ...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제2권4장7절).


제4강령에 보면 저항할 수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당연히 구원을 받아요. 그런데 이것이 저항할 수 없는가? 자, 극단적 칼빈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 ...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 자유의지가 없는 거죠. 하나님은 사람들의 의지를 지배하시고 그것을 기울어지게 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조정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죠? 로봇입니다. “왼쪽으로 가. 오른 쪽으로 가. 앞으로 가. 뒤로 가. 믿어. 믿지 마. 해. 하지마라.”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 지어라.” 이렇게 하시나요?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 그 사람이 살인하는 것, 간음하는 것이 다 하나님 뜻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 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제가 잘못된 겁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4강령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표준킹제임스성경] 베드로후서 3:9

주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여기는 것처럼 그분의 약속에 관하여 더디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만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도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하나님의 마음 같아서는 정말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예수님이 죽으시기까지 하셨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거절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심정은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4강령 저항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표준킹제임스성경] 마태복음 23:37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야, 암탉이 그녀의 병아리들을 자기 두 날개 아래로 모으는, 바로 그와 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너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려고 하였느내! 그런데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보면, ‘내가 얼마나 자주 너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려고 하였느내! 그런데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원하셔도 인간은 얼마든지 자유의지로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성경적 구절들이 보여주죠. 모든 것이 조화롭게 돼야 됩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5강령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이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우리라. <표준역>요 6:40) 으로 보건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도르트신조)


“이구절들은그리스도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10:22)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고전 9:24 - 27에 대한 칼빈의 주석).


마지막 제5강령을 보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이에요. 칼빈주의 5대강령 중에 그나마 제일 건전한 거에요. 일단 제목과는 상관없이 원래 성도의 견인은 어떤 뜻이냐면요? 먼저  칼빈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요한복음 6장 40절을 인용합니다.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이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우리라.’” 결국 ‘그를 믿는 모든 이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라고 하죠. 쉽게 말하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는다는 칼빈주의의 제5강령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는 것은 아주 건전한 교리죠.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반드시 성취되고 하나님께 심판받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니까요. 여기서 심판은 지옥이 되겠죠? 자,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를 하냐면요? 칼빈이 한 말입니다. ‘“이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10:22)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성도의 견인을 끝까지 견디는 것과 연결을 해요. Perseverance라는 말 자체가 견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성도의 견인하면, 성도가 견디면이죠. 그런데 견인은 견인차가 차를 끌고 가듯이 구원이 끝가지 보장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칼빈은 그것을 성도가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을 끝까지 이루어 주셔서 반드시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데, 사실은 알고보면 끝까지 잘 견뎌야 진짜 선택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안다.”라는 거에요. 끝에 가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섞여 버려요. 그래서 사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아닌 행위 구원으로 빠져 버린 겁니다. 행위로 구원이 유지된다. 그러니까 끝이 알미니안주의랑 같아져 버린거죠.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안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견인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견인해 주시지 성도가 직접 견인한다고 믿지 않아요.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5강령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표준킹제임스성경] 마태복음 24:13-14

그러나 끝까지 견딜 자, 바로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하면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로서 온 세상에 선포되리라. 그러고 나서 그때 끝이 오리라.

[표준킹제임스성경]마태복음 24:3

⋅⋅⋅”우리에게 알려주소서. 언제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그리고 당신께서 오시는 것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였더라.


자, 마태복음 24장 13절, 14절을 칼빈이 인용한 구절인데요. ‘끝까지 견딜 자, 바로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 현재형으로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마치 지금 내가 내 인생에서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는다는 인생의 끝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의 문맥은 미래형입니다. 분명 어떤 시점이 있어요. ‘그리하면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로서 온 세상에 선포되리라. 그러고 나서 그때 끝이 오리라.’ 특정 기간을 얘기합니다. 그 기간의 끝까지 견뎌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기간의 끝은 마태복음 24장 문맥에 보면 바로 세상의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서 나온 대답이기 때문에 문맥상 이것은 세상의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 대환란 때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때 대환란이라는 말이 바로 마태복음 24장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것 (끝까지 견디는 자)만 인용을 해서 강조를 했더니 어떻게 돼죠? 개인의 인생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돼 버리는 거죠. 그렇게 잘못 연결을 했습니다.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5강령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표준킹제임스성경] 로마서 8:38-39

이는 내가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니, 곧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자 권능들이나 현재의 것들이나 다가올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떠한 다른 창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에수 우리 주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으리라.


우리는 분명히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으리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죠.


강조와 반복의 법칙의 예시 - 칼빈주의 5대강령

제5강령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표준킹제임스성경] 빌립보서 1:6

바로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수라시리라는 것이라.

[표준킹제임스성경]에베소서 4:30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비통하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장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견인의 주체도 하나님이다라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죠?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수라시리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완수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에베소서 4장 30절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비통하게 하지 말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죠? 왜 비통하게 하지 말라고 하냐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장을 받았느니라.’ 이 구속의 날은 로마서 8장에 보면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가 휴거되고 몸이 변화돼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그런 몸이 될 때까지, 영원히 죄없이 살 수 있는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인장을 딱 찍어서 지켜 주시는 거예요. 내가 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는 겁니다. 자, 이부분들, 그들이 하는 말 중에 맞는 말들도 있어요. 그런데 극단적으로 치우친 말들이 있죠. 그래서 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제가 믿지 않는 겁니다. 이것을 다 극단적으로 믿어 버리면 극단적 칼빈주의자가 되는 거고 상식적으로 성경적으로 믿으면 그냥 온건한 칼빈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만큼만 강조해야 된다. 하나님이 한 번 등장시켰으면 한 번만 하고 두 번 등장시켰으면 두 번만 하고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반복요법을 쓰시는데 하나님이 쓰시지 않은 것을 내가 너무 강조를 해 버리면 이렇게 극단적인 해석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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